[우리말 겨레말] ‘안팎’에 새겨진 ‘ㅎ’

[우리말 겨레말] ‘안팎’에 새겨진 ‘ㅎ’

이경우 기자
입력 2016-05-12 14:15
수정 2016-05-13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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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에는 역사상 가장 오래된 벽화가 있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작품이다. 그들은 상처 입은 들소와 커다란 수사슴을 비롯해 벽과 천장에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동물들이 많이 잡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울산의 반구대 바위에는 고래, 거북이, 물개, 상어, 사슴, 멧돼지, 호랑이, 여우, 늑대 등 20종이 넘는 동물이 새겨져 있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도 보인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남겼다. 그들은 이곳에서 다산과 풍요를 기원했다.

인류는 문자를 발명하면서 더 섬세하고 많은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중국 은나라 사람들은 거북의 껍질과 짐승의 뼈로 점을 쳤다. 그리고 내용과 결과를 그 위에 새겨 넣었다. 갑골문이라고 불리는 이 문자는 한자의 유래가 된다.

인류가 출현하기 이전 생물들은 기록을 남길 줄 몰랐다. 대신 그들은 몸으로 때웠다. 의도치 않게 퇴적암 속에 묻히고, 호박 속에 갇혔다. 이렇게 화석이 된 생물들이 그 시절 이야기들을 던진다. 영화 ‘쥐라기 공원’에도 화석의 일종인 호박이 등장한다. 이 호박 속에는 모기가 들어 있는데, 공교롭게도 그 모기는 공룡의 피를 빨아 먹은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이 모기로 인해 공룡은 다시 세상으로 나온다. 화석이 1억 년 전의 일들을 전하며 상상하게 만든 것이다.

사람들의 언어에도 화석이 있다. 언어 속 화석도 슬며시 자신을 드러내며 옛일들을 알린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 ‘안팎’도 그러한 예 가운데 하나다. ‘안팎’에는 화석 같은 ‘ㅎ’이 박혀 있다. ‘안팎’은 ‘안’과 ‘밖’을 합친 말인데, ‘안밖’이 아니라 ‘안팎’이 됐다. 바로 ‘안’에 붙어 있던 ‘ㅎ’ 때문이다.

‘안’은 중세 국어에서 ‘히읗종성체언’이었다. 다시 말해 ‘안’은 본래 ‘ㅎ’을 종성(끝소리)으로 가진 말이었다.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 앞에서는 ‘ㅎ’이 그대로 유지됐고, ‘밖’처럼 뒤에 ‘ㅂ’으로 시작되면 그것과 결합해 ‘ㅍ’이 됐다. 지금 [안팍]으로 발음하고 ‘안팎’으로 적는 이유다.

마찬가지로 히읗종성체언 뒤의 ‘ㄱ’, ‘ㄷ’은 ‘ㅎ’과 결합해 ‘ㅋ’, ‘ㅌ’이 됐다. ‘머리’, ‘살’, ‘암’, ‘수’ 같은 말들도 모두 히읗종성체언이었다. 끝에 ‘ㅎ’이 붙은 말들이었다. 따라서 ‘머리카락’, ‘살코기’, ‘암탉’, ‘수탉’, ‘수퇘지’가 됐다. 이 말들에도 ‘ㅎ’이 화석화돼 있다. 중세 국어의 흔적과 쓰임새를 전하고 있다.

북녘에서도 역시 ‘안팎’이다. ‘안팎’의 의미도 다 같이 확장시켜 왔다. 눈덩이처럼은 아니지만 조금씩 의미의 영토가 넓어졌다. 말도 굴릴수록 커져 가기 때문이다. ‘사물이나 영역의 안과 밖’을 뜻하는 말에서 출발해 곧 ‘안팎이 다른 사람’에서처럼 ‘마음속 생각과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의 뜻도 갖게 됐다. ‘그 집은 안팎이 모두 부지런하다’에서는 부부의 의미로 쓰였다. ‘스물 안팎의 청년’에서는 ‘어떤 수량이나 기준에 조금 모자라거나 넘치는 정도’의 뜻이다.

여기까지는 남과 북이 같이하는 내용이다. 북에서는 이 외에 ‘집안 살림과 바깥 살림’을 아울러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된다. 조선말대사전은 세 번째 뜻풀이를 이렇게 하고 있다. 사는 방식과 문화가 달라지니 ‘안팎’의 쓰임이 다른 상황도 생겨났다.

이경우 기자 wle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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