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에 “합의가 중요”, 안호영 “이행이 더 중요””자구에 얽매이지 말라” vs “문안에 모든 게 나와” 워싱턴 외교전 와중 첫 회동…미래지향에는 한목소리
일본 산업혁명시설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따른 후속 대응을 놓고 미국 워싱턴D.C.에 주재하는 한국과 일본의 대사가 공개 석상에서 치열한 설전을 벌였다.
연합뉴스
다카자네 야스노리 (高實康稔) 일본 나가사키(長崎)대 명예교수가 6월 3일 일제 강점기 병기 생산 시설인 미쓰비시병기 스미요시 (住吉)터널공장(일본 나가사키시 소재)의 안내판을 가리키고 있다. 이 안내판에는 조선인 강제 동원 사실이 명시돼 있다.
연합뉴스
연합뉴스
한·일 양국이 ‘합의’한 것 자체에 의미를 두면서 예민한 강제노역 논란을 적당히 번복하고 넘어가려는 일본 정부와, 합의 자체보다는 실질적인 약속의 ‘이행’에 방점을 찍는 우리 정부 사이에 대리전이 펼쳐진 양상이다.
안호영 주미대사와 사사에 겐이치로 주미 일본대사는 8일(현지시간) 미국 헤리티지재단에서 열린 ‘대사들의 대화’ 세미나에서 일본 산업혁명시설의 유네스코 등재에 대한 평가와 후속 조치를 놓고 첨예한 시각차를 드러냈다.
우선 사사에 대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한·일간 합의를 통해 일본 문화유산을 등재한 것이 중요한 것이지, 다른 것들은 사소하다”고 주장했다.
사사에 대사가 언급한 ‘다른 것들’에는 강제노역 논란이 포함된 것으로 해석된다. 다시말해 일본이 당초 조선인들의 강제노역 사실을 인정했다가 추후 국내에서 이를 번복하면서 빚어진 논란을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가겠다는 의도가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주 독일 본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과거 일부 산업시설에서 1940년대 한국인 등이 ‘자기 의사에 반해’(against their will) 동원돼 ‘강제로 노역’(forced to work)했던 일이 있었다”고 인정한 바 있다.
사사에 대사는 “유네스코 등재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과 한국이 협의를 하고 합의를 이뤄냈다는 것”이라며 “양국의 제안이 유네스코 위원회에서 합의 하에 채택된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과거사와 관련해 일부 논란이 있고 양국 모두 국내적으로 어려움이 있음에도, 합의를 만들어냈다는 것이 매우 행복하고 만족스럽다”며 “이것은 우리가 자랑스러워하고 평가해야 할 부분이며 나머지는 사소하다”고 거듭 주장했다.
그러자 안 대사는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모든 것이 문안으로 나와있다는 것”이라며 “앞으로 양국이 합의한 것을 어떻게 이행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반박했다.
이는 한일 간 합의를 바탕으로 의장국인 독일이 강제노역 반영을 위한 주석을 단 결정문 수정안을 마련하고 이를 위원국 전원의 컨센서스로 통과시킨 만큼, 이를 토대로 강제노역 인정과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후속조치를 이행하라는 주문이다.
안 대사는 “이 같은 합의에 이르기까지 국제사회가 보여준 노력을 평가한다”며 “특히 유네스코도 일본이 합의한 것을 제대로 이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고 밝혔다.
안 대사는 그러면서 “이번 유네스코 등재 과정에서 한일 양국이 합의한 정신을 잘 살려 양국 관계 정상화의 좋은 모멘텀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며 “양국이 미래지향적 관계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사에 대사는 발언 기회를 자청해 “너무 구체적인 자구(language)에 얽매여서는 안된다고 본다”며 “너무 깊이 들어가 논의하지 말고 앞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성김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 겸 동아태 부차관보(한·일 담당)가 참석한 이번 세미나는 미국 워싱턴D.C.를 무대로 ‘과거사 외교전’을 벌이던 안 대사와 사사에 대사가 한 자리에 모였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2013년 상반기에 부임한 두 대사가 공개적인 토론석상에서 마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통 외교관의 길을 걸어온 두 대사는 각각 외교부의 ‘2인자’로 있으면서 서로 카운터파트를 맡았던 전력이 있다.
2012년 3월 당시 외무성 사무차관을 맡고 있던 사사에 대사는 당시 외교차관이었던 안 대사의 전략대화에서 이른바 ‘사사에 안’을 제시한 바 있다. 일본 총리가 한국 대통령에게 사죄하고, 주한 일본대사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방문해 사죄하며, 정부 예산으로 보상한다는 안이었다.
그러나 우리 측은 일본이 ‘법적 책임’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이를 거부했다.
사사에 대사는 이날 세미나에서 ‘사사에 안’의 효용성에 대해 “당시 친구로서 안 대사에게 비공식 제안을 한 것이었다”며 “우리는 진지하게 이 문제를 다루려고 노력했었다”고 소개했다.
사사에 대사는 “현재 양국이 외교채널을 통해 진지하게 논의가 진행되는 것으로 안다”며 “과거의 제안보다는 지금 현재 어떤 논의가 오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며, 기본적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을 낙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두 대사는 아직 한일관계가 풀리지 않은 상황임을 반영하듯 시종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연출했으나, 미래지향적 관계로 나아가자는데 대해서는 한 목소리를 냈다.
두 대사는 또 북한 핵문제와 인권 등을 놓고는 거의 같은 견해를 보였다.
한편, 성김 부차관보는 예민한 한일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을 삼간 채, 북핵 문제 등과 관련해 “북한이 진정성 있는 핵협상에 나설 용의가 있다면, 우리도 언제든지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며 “그러나, 현 시점에선 제재 이행을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