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최장 기간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가 22일 권좌에서 물러나라는 시위대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나섰다.
42년째 철권통치를 유지하고 있는 카다피는 이날 국영TV를 통해 방영된 대 국민 연설에서 강경한 어조로 “시위대와 싸우다 순교자로서 죽을 것”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갈색 두루마기 전통 의상에 터번을 쓰고 연단에 선 카다피는 비장한 모습으로 원고 없이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무아마르 카다피는 혁명의 지도자이고, 무아마르 카다피는 공식적인 자리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물러날 수도 없다. 무아마르 카다피는 영원한 혁명의 지도자”라고 소리친 뒤 “이곳은 내 조국, 바로 내 조국이고, 나는 내 조상의 땅에서 순교자로 죽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카다피는 연설 도중 수시로 주먹을 불끈 쥐거나 연단을 내려쳤고 “나의 마지막 피 한 방울이 남을 때까지 싸울 것”이라며 시위대에 대한 강경 진압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시위 진압 현장에 전투기가 동원되고 무차별 총격이 자행되고 있다는 보도를 의식한 듯 “나는 무력을 사용하라고, 총을 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만일 내가 그랬다면 모든 것이 불에 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카다피는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시위대를 향해 맞서 싸우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그는 “카다피를 사랑하는 남성과 여성 모두 당신의 집에서 나가 거리를 채워라. 당신의 집을 떠나 은신처에 있는 그들(시위대)을 공격하라. 내일부터 통제선은 해제될 것이니 나가서 그들과 싸워라”라고 격정적으로 말했다.
카다피는 “오늘밤부터 내일까지 모든 젊은 남성은 민간 경비대 구성을 위한 지역위원회를 설립해야 한다”며 경비대원 식별을 위해 초록색 팔찌를 착용하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그는 이어 리비아의 불안정은 알-카에다가 기생할 수 있는 기지를 제공하는 셈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1989년 중국 톈안먼(天安門) 사태 당시 국제사회가 개입하지 않았다며 리비아 시위사태에도 외부세력의 개입이 있어선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울분에 찬, 때론 광기가 서린듯한 그의 연설이 지속되는 75분 동안 그의 뒤로는 폭격으로 폐허가 된 트리폴리 관저가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화면에 자주 보였다.
이 관저는 1986년 미군의 폭격으로 파손된 건물로, 리비아는 저항을 상징하는 의미로 건물을 수리하지 않은 채 보존하고 있다.
미국은 1986년 베를린의 미군 전용 디스코텍에서 폭탄테러로 3명이 숨지고 200여 명이 부상하자 이를 리비아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같은 해 4월 수도 트리폴리와 벵가지에 대한 공습을 단행했다.
이 공습으로 카다피의 생후 15개월 된 수양딸이 숨지는 등 41명이 사망했고, 이에 리비아는 1988년 12월 영국의 스코틀랜드 로커비에서 미 팬암기를 폭파시켜 270명을 숨지게 함으로써 양국 관계는 더욱 경색됐다.
카다피가 퇴진 거부 의사를 밝히는 연설장소로 이곳을 활용한 것도 본인이 도전받을 경우 피의 보복으로 상대방을 더욱 강력하게 응징하겠다는 의지로도 풀이된다.
반 정부 시위가 수도 트리폴리까지 확산됨에 따라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는 카다피가 초강경 어조로 시위대를 향해 역공에 나설 수 있는 배경은 그가 군부를 장악하고 있어 충분히 시위를 진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튀니지와 이집트 시민혁명 당시에는 군부가 중립적 입장을 고수하려 했지만 리비아군의 경우 정권에 대한 충성도가 높고, 핵심 역할을 하는 부대는 대부분 카다피의 아들들이나 측근이 장악하고 있어 시위에 대한 초강경 진압이 무리 없이 자행되고 있다.
두바이=연합뉴스
42년째 철권통치를 유지하고 있는 카다피는 이날 국영TV를 통해 방영된 대 국민 연설에서 강경한 어조로 “시위대와 싸우다 순교자로서 죽을 것”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갈색 두루마기 전통 의상에 터번을 쓰고 연단에 선 카다피는 비장한 모습으로 원고 없이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무아마르 카다피는 혁명의 지도자이고, 무아마르 카다피는 공식적인 자리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물러날 수도 없다. 무아마르 카다피는 영원한 혁명의 지도자”라고 소리친 뒤 “이곳은 내 조국, 바로 내 조국이고, 나는 내 조상의 땅에서 순교자로 죽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카다피는 연설 도중 수시로 주먹을 불끈 쥐거나 연단을 내려쳤고 “나의 마지막 피 한 방울이 남을 때까지 싸울 것”이라며 시위대에 대한 강경 진압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시위 진압 현장에 전투기가 동원되고 무차별 총격이 자행되고 있다는 보도를 의식한 듯 “나는 무력을 사용하라고, 총을 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만일 내가 그랬다면 모든 것이 불에 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카다피는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시위대를 향해 맞서 싸우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그는 “카다피를 사랑하는 남성과 여성 모두 당신의 집에서 나가 거리를 채워라. 당신의 집을 떠나 은신처에 있는 그들(시위대)을 공격하라. 내일부터 통제선은 해제될 것이니 나가서 그들과 싸워라”라고 격정적으로 말했다.
카다피는 “오늘밤부터 내일까지 모든 젊은 남성은 민간 경비대 구성을 위한 지역위원회를 설립해야 한다”며 경비대원 식별을 위해 초록색 팔찌를 착용하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그는 이어 리비아의 불안정은 알-카에다가 기생할 수 있는 기지를 제공하는 셈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1989년 중국 톈안먼(天安門) 사태 당시 국제사회가 개입하지 않았다며 리비아 시위사태에도 외부세력의 개입이 있어선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울분에 찬, 때론 광기가 서린듯한 그의 연설이 지속되는 75분 동안 그의 뒤로는 폭격으로 폐허가 된 트리폴리 관저가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화면에 자주 보였다.
이 관저는 1986년 미군의 폭격으로 파손된 건물로, 리비아는 저항을 상징하는 의미로 건물을 수리하지 않은 채 보존하고 있다.
미국은 1986년 베를린의 미군 전용 디스코텍에서 폭탄테러로 3명이 숨지고 200여 명이 부상하자 이를 리비아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같은 해 4월 수도 트리폴리와 벵가지에 대한 공습을 단행했다.
이 공습으로 카다피의 생후 15개월 된 수양딸이 숨지는 등 41명이 사망했고, 이에 리비아는 1988년 12월 영국의 스코틀랜드 로커비에서 미 팬암기를 폭파시켜 270명을 숨지게 함으로써 양국 관계는 더욱 경색됐다.
카다피가 퇴진 거부 의사를 밝히는 연설장소로 이곳을 활용한 것도 본인이 도전받을 경우 피의 보복으로 상대방을 더욱 강력하게 응징하겠다는 의지로도 풀이된다.
반 정부 시위가 수도 트리폴리까지 확산됨에 따라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는 카다피가 초강경 어조로 시위대를 향해 역공에 나설 수 있는 배경은 그가 군부를 장악하고 있어 충분히 시위를 진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튀니지와 이집트 시민혁명 당시에는 군부가 중립적 입장을 고수하려 했지만 리비아군의 경우 정권에 대한 충성도가 높고, 핵심 역할을 하는 부대는 대부분 카다피의 아들들이나 측근이 장악하고 있어 시위에 대한 초강경 진압이 무리 없이 자행되고 있다.
두바이=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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